CES 2023 후기

물건 이야기 2023. 1. 8. 17:05

아직 라스베가스에 있을 때 사흘 훑어보고 정리하고 마운틴뷰에 와서 쓰는 후기. 길어 보이지만 읽을만한 길이이다.

 

1. 먼저 그냥 전시회 이야기
2. 간단한 이번 CES 진짜 후기
3. 전시회 자체에 대한 후기
4. 결론

 

이 아저씨가 아직도 일하는 동네가 라스베가스. 내가 아는 미국은 아주 천천히 변하는 나라다.

1. 먼저 그냥 전시회 이야기


CES에는 4-5년에 한번씩 온다. 내가 만든 물건 팔러도 두어번 정도는 왔었던 것 같다. COMDEX도 그랬었는데 요즘엔 하는지도 모르겠다. MWC는 딱 한번 갔었는데 MWC는 말고 바르셀로나는 다시 가보고 싶다. 해외 전시회에 대개는 회사, 드물게는 세금의 지원으로 가지만 가끔은 내 돈 내고도 간다. 내돈내산의 가치가 있는지는 각자 다르겠지만. 내 경우엔 크게 손해 보는 느낌이 아니다.

이런 류의 전시회는 전시장이 너무 크고, 다양한 전시물이 넘쳐서 힘들다. 종일 걸어야 해서 다들 3만보를 걸었네, 4만보를 걸었네 하지만, 내가 매번 걸은 거리를 보면 하루 1만 5천보 ~ 2만보 정도이다. 그냥 산 넘고 강 건너는 도보 여행은 계속 걷지만, 여긴 서서 보는 시간이 많아서다. 뭔가 팔러 왔을 때가 훨씬 힘들다. 같은 이야기를 100번도 더해야 하거든.

전시회가 좋은 점은, 관심있던 주제에 대한 제품의 실물을 볼 수 있고, 진짜 궁금한 건 물어볼 수도 있어서다. 팔릴 수 있는 수준의 물건들은 인터넷에서 쉽게 정보를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보기만 하면 된다. 보는 게 중요하다. 난 사진은 거의 안 찍는다. 예전에는 열심히 찍었는데 다시 열어보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시회 후 CES 관한 발표를 하기로 했다면 모르겠지만, 그쪽은 내 취향도 아니고 잘하는 영역도 아니다.

누군가의 지원으로 특정 영역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하거나, 장사하러 온 경우가 아니라면, 내게 전시회의 의미는 아주 빠른 속도로 이런 저런 생각을 머리에 스치게 하는 장소의 의미이다. 이제 머리가 예전 같지 않아서 잘 인덱싱은 안되지만, 대단한 것이든 아니든 ‘그런 게 있었지’가 나중에 몇 개만 생각나도 본전은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전시회 후 뭐 좋은 거 있었나? 하면 크게 이야기할 것이 없을 때가 많다 (이 장면에선 돈이 좀 아깝다는 느낌도 살짝 든다.)

사실 전시의 주요 핵심내용은, 진짜 눈으로 본 것의 이면까지를 아주 잘 정리해주는 훌륭한 선수들에게서 들으면 된다. 최근엔 그런 행사를 유료로도 많이 하는데 품질이 짱이다. 비용도 진짜 오는 비용의 수십 분의 1 정도다. 직접 온다 해도 그 해의 강렬한 메시지라고 보도되는 많은 것들은 키노트 스피치에서 큰 회사의 높은 분들, 그리고 전시장 오픈 전, 미디어들에게만 공개되는 그런 데서 나오기 때문에 게으른 민간인들에게는 직접 접근할 기회가 없고 전시물에서 간접적으로 느껴야 한다. 그런 직관이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없다.

뭘 팔려고 왔다면 진짜 비즈니스는 전시장 플로워가 아니라, 전시장에 딸려있는 미팅 룸, 그리고 전시장과 구분된 (대개 다른 층에 있는) 별도의 미팅룸, 따로 잡은 호텔의 큰 방에서 이루어진다. 예전에 나도 장사(?)할 때는 회의실이 따로 있는 큰 방을 잡고, 그 방에서 buyer들과 미팅을 시간별로 잡아서 했다. 그렇게 해야 하루에 중요한 미팅 10여 개를 편하게 할 수 있다. 전시장은 그냥 느낌을 주고받기 위한 자리라고 보면 된다. 또 어떤 전시 가서 계약했다는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증언에 있듯이 99.76%는 구라다. 요즘은 안 하는 것 같지만 ’이번 전시를 통해 계약/상담 .. 얼마.. ’ 이런 기사는 다 소설이다. 특히 정부지원의 단체 전시의 경우 전시 끝난 후 숫자를 적어 달라고 한다. 이럴 때 2억 불 정도 쓸 용기가 필요하다고나 할까..

 

2. 간단한 이번 CES 진짜 후기 .. 신기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입장에서.


자동차(보다는 mobility). 어느 날 CES의 중심으로 왔다. 몇 년 전 CES에서 나온 이야기들 가운데 그나마 현실적인 것들이 현실로 온 느낌이다. 좋다. 아직도 약간의 설레발들이 좀 있지만 이제 좀 차분해진 느낌이랄까. 그리고 앞으로도 중요한 부품인 라이다들이 좀 정리된 것 같지만, 이 정도 기술로 되는 것인가? 하는 강력한 의문이 아직 남아있다.

 

소니의 (꽤 현실적 모습의) 자동차에 사람이 진짜 많았다. 내가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차 앞쪽에 밖에서 볼 수 있는 디스플레이다. 여기에 ‘난 사람이 운전안해’ 표시, 택시를 위한 메시지, 정치적 메시지, 광고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전. 음. 예전부터 그랬었는데 점점 더 over-engineering 의 느낌이 강한 제품이 많아지고 있다. 나만 그런가? 지금 목욕탕에 있는, 부엌에 있는 가전들이 별로 불편하지 않다. 입고 먹고 자는 일에 사람들은 늘 보수적이고 old tech가 매우 쓸만하다. 가전에 스마트 이름을 붙여 연결하는 것들.. 집에선 잘 모르겠다. 아마도 빌딩 관리 차원의 문제라면 아주 유용하고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가전은 그냥 전기 덜 먹고 예전과 같은 수준의 편리함을 제공하면 될 것 같다.

TV. 뭐가 남은 거지? 10년 전쯤 우리는 3D TV가 폭망한 걸 모두 보았다. 4K가 우리 집 FHD 보다 조금 좋은 건 느끼지만 꼭 바꿔야 할 정도는 아니고, 8K는 4K와 구분도 안된다. 물론 8K가 더 싸면 안 살 이유가 없겠다. 굵은 전원선을 스탠드에 숨긴 LG가 세계 최초의 wireless TV라고 크게 써놓은 것을 보고는 이 동네에 더 이상 할 게 없구나를 강하게 느꼈다. TV에 관한 한 4K, 8K 해상도보다는 오디오, 그보다는 감독, 출연자, 시나리오가 더 중요하다. (이건 HD가 세상에 처음 나올 때 많이 하던 이야기다.) 앞으로 TV 동네에 기술적으로 남은 건 전기를 훨씬 덜 먹는 TV가 아닐까 한다. 우리나라의 한 스타트업이 그래핀 난로(?)를 만들어서 혁신상도 받고 그랬는데, 지금은 TV가 바로 그 난로에 가깝다. 80“ 정도 TV 앞에 서면 얼굴이 후끈하다.

Health. 역대급으로 많은 것들이 나왔다. 한국 회사들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했다. 센서와 AI가 한 몫했다. 조심스럽지만, 실제 병원에서 사용할 수준의 하이엔드 몇 개 빼고는 스마트워치, 앱 등으로 흡수되어 다 망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정부의 규제가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지만, 하드웨어 시장은 지금의 체온계처럼 난장판으로 바뀌고, 기술이 필요한 영역은 소프트웨어 서비스 형태로 바뀔 것 같다.

오디오. 예전엔 진짜 오디오, 카 오디오, 스피커 등이 CES 주요 아이템이었는데.. 음. 지금은 없다고 보면 된다. 이미 특이점을 넘었다는 뜻이다.

기타 등등. 이거 저거 많이 있다. 조금씩 좋아졌다고 주장했다. 끝.

유레카 존 전체. 여기가 내가 CES를 간 이유의 반 정도 되는 곳인데. AI 관련한 것이 전체의 반도 넘는다. 비슷한 게 너무 많았다. 특히 Health 관련해서는. 늘 그렇지만 환경/AR/드론/로봇 관련한 것도 매우 많고. 만들기 전에 뭘 찾아보질 않았는지, 뭐 소소한 거 하나를 바꿨는지 예전에 나왔던 것들을 다시 만든 회사들도 많았고. 물론 신기한, 될 것 같은 것들도 좀 있고. (바이오, 반도체, 초고속망 등) 기술 중심의 진지한 스타트업도 꽤 발견되었다.

 

3. 전시회 자체에 대한 후기


CES는 큰 전시회다. 그러나 아직은 견달만 한 사이즈이다. 내가 가본 전시회 가운데 가장 컸던 건 하노버 메쎄였는데, 거긴 정말 컸다. 자주 올 때는 CES의 전시장 사이, 호텔 사이 길을 잘 알았었는데, 오랬만에 와서 그런지 지도가 머리에서 사라진 관계로 약간의 혼란이 있었다.

LG 전자가 전시 자체의 관점에서는 One-Top이었다. 예전 일본 회사들의 위치에 자리 잡았다. 올해도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입구의 전시는 예전의 LCD 터널보다는 못했지만 아직 압도적이다.

삼성전자에는 들어가 보지도 않았다.

우리나라 부스 전반. 느낌이 그런가, 약간 폐쇄적인 부스 설치를 한 곳이 많았다. 벽을 높게 쌓았다. 그 벽 때문에 접근성이 좋지 않아진 곳도 있었다. 벽을 만들어도 개방감과 접근성을 다른 회사 부스위치를 보면서 잘 만들어야 하는데. 좀 더 비싼 회사를 고용해야 한다는.

한국 회사들 가운데 백미는. 롯데다. 비싼 전시 공간의 일부를 회사 소개에 쓰고 있었다. 이건 회장님이 부스에 오신다는 소문이 있을 때만 하는 거. 아마 내부에서 반대도 있었을 텐데.. 건투를 빈다.

 

그룹사 직원들 수고가 많다


소문이 많던 존디어의 그 농사짓는 머신의 실물을 처음 봤는데.. 얼마 전 제주도의 모 미술관에서 본 헝겊 고릴라 작품이 생각났다. 이거와 바퀴가 사람 키보다 큰 CAT의 큰 트럭을 실제로 본 걸로 CES 갔던 비용의 1/3 정도는 보상받은 느낌이다. 이걸 전시장에 어떻게 끌고 들어왔지?

 

오른쪽 고릴라와 달리 왼쪽의 머신은 쓸모가 조금 있다

유레카 존의 유럽나라들. 전시보다는 상담에 더 집중하는 부스 설치라 자기네 만들 걸 자랑하는 포스터가 부실해 전시를 훑어보는 족속에 속한 내겐 불편했다. 그러나 중앙에 넓은 공간을 여유롭게 활용하고 있어 여유가 보였다. (아시아 나라들은 부스배치가 너무 촘촘해서 비집고 들어가려면 가벼운 용기가 필요한 수준이었다.) 프랑스관이 예전처럼 dressy 하지는 않았지만, 전반적으로 유럽 국가들은 컬러를 아주 잘 써서 다른 나라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예쁜 느낌.

유레카 존의 일본, 이스라엘. 아이디어가 아닌 기술 기반의 스타트업이 많았다.

유레카 존의 우리나라. 열 개쯤의 세금 지원받는 기관들이 별도의 섹션에 자리를 마련한 것 같다. 주최 측에겐 큰 고객이었을 것이다. 프랑스처럼 다 모아서 했었으면 더 좋았겠다. 몇몇 대학들도 단체로 참가했다. 주최 측에서 주로 우리나라 학교들인 고객을 위해 University 섹션을 따로 이름 붙여 마련했는데.. 음.. 이다. 독자적 섹션을 준비한 일부 대학에 비하면 위치상 매우 불리한 구석이었다. 늘 발견하는 건데 전시에 우리나라 선수들 가운데 일부는 매우 active 했지만, 더 많은 일부는 뭔가 의무방어전으로 나왔다는 느낌이 강했다. 자료도 한글 only인 회사도 있었고. 내 세금이 ㅠㅠ. 요즘엔 대부분 회사에서 영어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 일부 통역을 동원한 회사도 있었다. 참여 기관에서 섭외해줬다는데 영어는 되지만 기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배울 의지가 없는 부실한 통역 알바를 조달한 기관은 반성하라~~ 한편, 다르게 생각하면 한국 관람객이 워낙 많기 때문에 그냥 코엑스라고 생각하고 전시에 참가했다 생각하고 견문을 넓힐 기회로 봐주는 것도 가능하다. 뭔가 진짜 팔 준비가 되어있고 active한 회사라면 어차피 가는 거 유레카 존보다는 돈이 좀 더 들더라도 미리미리 준비해서 다른 곳에 자리를 잡고 (한국, 외국 할 거 없이) 이력서 내듯 미리 잠재적 고객에게 DM을 보내 ‘널 위해 전시를 준비했다’고 ‘꼭 오라’고 하고 홍보를 해야 한다. 원래 장사는 주도적이어야 한다.

 

결론


또 몇 년은 안 가도 되겠다.

ps. 전시장에서 지나다가 만난 분들.. 오프라인에서 몇 년 만에 뵌 분들 다들 살아계신 거 보니 감사하고 반가웠다. 몇 분은 지나가시는 거 좀 봤는데 아는 척 안 해서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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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l1it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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