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은 100년을 보고 한다고 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100년은 좀 그렇고, 그래도 꽤 멀리 보고 방향성을 정해야 하는데, AI라는 걸 앞에 두고는 그 방향성을 다음 주에 바꿀 수 있다는 마음가짐도 함께 가져야 한다. 요즘같은 험난한 교육 환경에서, 정부는 대학을 '어떻게' 지원해야 할까?

 

1. 초중등교육

 

초중고 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그들을 대학교에 잘 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곧 세상의 주인이 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헌법상 세상의 주인이 될 사람은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고, 법률에 따라 정부는 고등학교 교육까지를 무상으로 제공할 의무가 있다. 의무인 이유는, 그 교육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할지, 그 세상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사회도 자기 자신도 의미 있고 지속가능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지를 다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무'인 초중등교육에서는 지원이란 단어가 쓰이지 않는다. 정부는 그 의무교육을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교육과정을 만들고 이런저런 제도를 운영한다. 늘 그렇듯이, 효과성과 효율성의 추구는 학생 개개인의 창의성, 지역이나 환경의 다양성을 억누르는 기제로 작동한다. 그래서 어렵다. 또한 교육이 세상을 다루는 일인 만큼 사람마다 관점이 다르고, 의무교육으로서 세금도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초중등 교육은 언제나 정치적인 무언가가 된다.

 

2. 고등교육

 

이 글은 초중고 교육보다 헌법상 덜 강제적인 고등교육에 관한 이야기이다. '고등교육'의 명확한 정의는 법에 없다. 사실 우리나라 법에서는 '교육'이 무엇인지조차 정의하고 있지 않다. 고등교육은 '고등교육기관이 하는 일'이라고 재귀적으로 법에 나올 뿐이다. 고등교육기관에는 대학, 산업대학, 교육대학, 전문대학, 원격대학(방송대학·통신대학·방송통신대학·사이버대학), 기술대학 등이 포함된다.

 

고등교육은 여러 존재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들은 모든 규모의 사회를 해석하고,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힘과 관련된 것이다. 그 힘을 학생들이 갖게 하거나, 어떤 힘에 밀려 어려워지는 것을 버티고 맞설 수 있는 또 다른 힘과 용기를 갖도록 도와주는 것이 고등교육이다. 현대적인 교육체계에서 그런 '힘'들은 초중고 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갖추게 되는 그릇에 담긴다. 그래서 고등교육 이전의 각 교육 단계는 그 그릇을 가질 '자격'을 확보해가는 과정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AI 전환, AI-native 시대를 맞이하여 대학의 존재 이유, 즉 어떤 힘이 여전히 필요하고 어떤 힘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논의도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그건 별도의 '거룩한' 주제이다. 우선 여기에서는 대학이 당분간 존재해야 한다는 가정을 전제로 이야기를 이어가자.

 

3. 고등교육의 비용

 

고등교육도 정부가 무상으로 지원하면 좋겠지만, 현실은 수많은 이유로 그러하지 못하다. 사립대학은 학생 또는 학부모가 부담하는 등록금으로 운영된다. 그 등록금 가운데 일부는 장학금이란 형태로 정부와 사회가 지원한다. 정부가 설립한 국공립대학은 사립대보다 적은 등록금과 시민들이 낸 세금으로 운영된다. 산업체들은 세금도 내지만 산학협력이라는 방식으로 대학을 직접 지원하기도 한다. 학교 법인의 지원, 학부모, 동문, 독지가 등 여러 경로의 후원 역시 대학의 직접 재원 또는 장학금의 형태로 중요한 수입원이 된다. 학생, 학부모, 동문, 산업, 사회가 모두 고등교육의 고객이자 수요자인지라, 자의든 타의든 여러 형태로 이용료를 부담하는 것이다.

 

문제는 대학의 그런 수입이 운영비 전체를 감당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학교마다 상황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법인은 자금 여력이 없고, 후원금도 거의 들어오지 않으며, 결정적으로 등록금은 10여 년째 거의 오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부족한 수입만으로 대학을 운영할 수도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 학교도 있다. 그러나 그 경우 앞서 이야기한 '힘'을 고객이 기대하는 수준으로 키워주기 어려워진다. 학령 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그런 학교는 경쟁력을 잃고 결국 문을 닫을 수도 있다. 장기적 관점에서는 그런 학교를 자연스럽게 소멸하도록 두는 것이 나쁜 정책은 아닐 수 있다.

 

정부는 등록금 통제가 없었다면 오지 않았을 수도 있는 이 어려운 상황에서, 최소한 세상이 유지되고 발전하는 데 필요한 '힘'을 지키기 위한 성의를 대학에 보인다. 그 성의의 일환으로, 또 대학의 경쟁력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혹은 적어도 대학이 무너지지 않도록 재정 지원을 한다. 세금을 대학에 별도로 투입하는 것이다. 등록금을 정부가 통제하고 있는 만큼, 재정지원은 그 통제에 따른 부록으로 딸려온다고도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정부가 학생과 학부모가 부담할 등록금 인상을 막는 대신, '재정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국민들이 낸 세금을 끌어다 보충해주는 구조이다.

 

4. 대학의 자율성

 

대학은 예로부터 '학문'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자율성의 집합체였다. 지금도 인문학과 자연과학 연구 등에서는 자율성이 추구되고, 그에 대한 지원이 '연구비'라는 형태로 재정지원과 분리되어 세금으로 제공된다. 그런데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대학을 둘러싼 환경은 바뀌었다. 스스로는 안 바뀌었다고, 안 바뀌겠다고 우겨도, 고객이 기대하는 대학의 역할은 달라졌다. 학문의 자율성보다는 산업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역할, 즉 '직업인의 양성'이 더 중요해졌다. 학문적 자율성은 이제 대부분의 학생들에게도 더 이상 호소력 있는 가치가 아닌 시대가 되었다.

 

각 대학은 각자 다른 환경에 존재한다. 학교 이름도 다르고, 학생도 다르고, 지역도 다르고, 주변 산업도 다르고, 연구 개발의 의지와 역량도 다르고, 교수와 직원도 다르다. 설립 이념과 교육 목표가 다르고, 저마다의 고유한 전통도 있다. 이 때문에 대학은 모두 다른 운영 방식이 필요하다. 학생을 모집하는 방법도, 지역과의 관계도, 산학협력의 방식도, 교수와 직원의 역할도 달라야 한다. 이를 대학의 '운영 자율성'이라 부른다. 학문적 자율성과는 별개의 개념이다. 운영 자율성은 '돈'과 함께 대학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구조적 토대이다.

 

5. 정부의 재정지원과 관리

 

등록금을 통제하고 재정지원을 하면서, 정부는 대학이 가진 학문적 자율성과 운영 자율성 두 가지 모두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재정지원이라는 당근을 미끼로 내밀고 채찍으로 대학이 갈 방향을 정한다. 대놓고 하는 채찍질도 있고, 채찍을 들지 않더라도 갈 방향에 선을 그어두기도 하고, 내버려두었다가 다른 방향으로 가면 당근을 거두기도 한다. 정부로서는 그런 표현이 불편할 수 있겠지만, 대학은 실제로 그렇게 느낀다. 안타깝게도 어떤 대학은 자율성을 자발적으로 내려놓고 정부가 원하는 방향으로 먼저 달려가 당근을 달라고 손을 내밀기도 한다.

 

정부에도 뛰어난 사람들은 많다. 정부가 제시하는 방향성 자체는 거시적인 세상 변화의 흐름을 대체로 잘 포착한다. 문제는 방향성의 정확도가 아니라 구체성의 수준이다. '동쪽' 혹은 '동북쪽' 같은 대략적인 방향이 아니라, '분침의 27분 방향'처럼 지나치게 세밀하게 각도를 정한다. 그러나 세상은 쉼 없이 변한다. 27분 방향은 1분 후에 틀린 방향이 되고, 20~30분 후에는 완전히 엉뚱한 방향이 된다.

대학마다 시계는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 어떤 대학의 분침은 빠르게 변화를 따라가고, 어떤 대학의 분침은 천천히 움직인다. 정부는 당근을 미끼로 모든 대학의 시계를 똑같은 시간, 똑같은 속도에 맞추려 한다. 그 과정에서 각 대학은 자신의 설립 목표, 환경과 조건에 맞게 움직일 수 있는 여지, 즉 자율성을 포기하게 된다. 당근을 받으려면 정부가 정한 정확한 방향에 분침을 맞춰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재정지원 사업에서 탈락한다. 결국 대학들은 자신의 시계를 버리고 정부의 시계만 바라보게 된다. 대학이 사회와 학생을 보며 각자의 방향을 정하고 학문적·실용적 협력을 통해 나아가야 하는데, 정부를 향해 서서 누가 정부의 분침과 가장 정확히 일치하는지를 놓고 경쟁하게 되는 것이다.

 

 

자율성이 본질적 가치인 대학에서 '정확한 분침'은 구성원의 창의성을 꺾는다. 구성원 스스로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직접 해봐야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대학들은 많은 정부 사업을 외주화한다. 외부 업체에 맡기고, 어차피 영구적이지 않은 운영 예산인지라 정규직 교직원이 아닌 사업 기간 동안만 유지되는 계약직에게 운영을 맡긴다. 그 결과, 자율적이지는 않았지만 정부가 정한 방향성에 맞춰 교육과 운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축적될 수도 있었던 역량마저 대학 내에 내재화되지 않는다. 지방의 경우 그 외주 업체는 대개 서울에서 온다. 정부 주도로 강제되었던 교육 역량이 학교에도, 지역에도 남지 않는 것이다.

 

정리하면, 정부가 지원(당근)과 관리(채찍)을 양손에 쥐고 흔들 때, 대학은 채찍을 피하고 당근을 얻기 위해 자율성을 포기하며 서서히 망가진다. 지속가능성을 잃는 것이다. 각 대학은 자신의 환경에 맞는 변화의 동력을 잃고, 그 동력을 스스로 만들어내려는 의지도 함께 줄어든다. 그렇게 세금 지원이 끊기면, 재정지원을 전제로 설계된 운영 방식이 작동을 멈추는 동시에 자율적 운영에 필요한 역량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가 된다. 여기에 재정적 어려움은 교수 채용을 막아 대학의 마지막 보루인 학문적 자율성마저 유지하기 어렵게 만든다. 다양성에 기초한 진화가 불가능해지면 관성으로 버텨야 하는데, 인구가 줄고 대학에 대한 원천적 수요 자체도 감소하면서 결국 대학은 흉칙한 모습으로 쪼그라든다.

 

6. 어떻게 해야 할까?

 

궁극의 정답은 대학이 등록금을 스스로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학생을 뽑는 방법도 대학이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 재정지원이 없는 대신 정부는 대학이 수여하는 '학위'가 의미 있는 절차를 거쳤는지만 검증하고, 교육 법인으로서 사기를 치고 있지 않은지만 감사하면 충분하다. 백만 가지 이유로 그게 어렵다면, 재정 지원을 하되 느슨하게 방향을 제시하고, 그 방향이 대체로 타당한지, 그 방향으로의 진행이 가능한지, 그리고 나중에 지원을 끊고 등록금을 자율화했을 때 지속가능한 운영 자율성을 확보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며 지원하면 된다. 그렇게 되면 대학은 학문적 자율성도 원하는 만큼, 최소한 각자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스스로 방향을 정할 것이다. 정부를 향한 경쟁이 아니라 등록금을 내는 학생과 학부모, 산학과제와 후원금을 내는 산업을 바라보며 경쟁하게 될 것이다. 대학에도 똑똑한 사람들은 많다. 스스로 갈 방향을 정하면, 최적은 아닐지라도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정부는 세금을 잘 걷어야 유지된다. 산업이 돌아가야 세금이 걷힌다. 세상이 변하므로 정부는 어떤 산업이 더 흥해야 하는지 늘 예측한다. 재정지원을 끊고도 정부가 특정 방향을 유도하는 좋은 방법은 그 분야의 학부 및 대학원 장학금을 확대 배정하는 것이다. 좋은 학생들이 그 영역에 모이게 된다. 대학들은 그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스스로 좋은 교육 시스템을 만든다. 그렇게 장기적으로 성과를 내고 평가를 받으며 발전한다.

 

*

 

ps. 이 글에서 대학에 대한 재정 지원은 인문학, 기초 과학 연구나 산업에서 하기 어려운 산업 기술 개발을 위한 지원이 아닌, 대체로 교육부가 대학에 다양한 이름으로 지원하는 교비 지원 사업을 주로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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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l1it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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