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나 선택에 직면한 삶을 살고 있다.
짬뽕, 짜장면에서부터
나경원, 박원순 중에 누굴 찍을까 ?
또 일부 집안에서는 명절 때 둘러 앉아 Go를 해야할까 말아야 할까 ? 까지.
사실 오랫동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까지 '나' 라는 개념이 생긴 이후 살아온 인생의 적어도 반 이상 동안은
(선택권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무조건 좋다는 믿음 아래)
사람이 더 배우고, 더 모으고, 더 느껴보는 것을 추구하는 중요한 이유가
선택의 폭을 넓히기 위함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즉, 인생과 관련된 어떤 갈림길에서 좀 더 좋은 조건이 생긴다는 것이다.
또, 내 인생 뿐만 아니라, 학생들과의 상담에서도,
선택권이라는 것의 중요성을 꽤 많이 강조했었다.
선택권이 자신에게 없으면 아마도 끌려다니는 삶을 살게 된다면서.
그런데 ...
(아마 다른 사람도 그랬을 거라는 엄청난 일반화와 함께)
살아오는 동안 몇 가지의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고 나서,
사실 인생이 꼭 그런게 아니라는 걸 조금씩 알게 되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사소한' 것들보다,
어느날 조용히 다가오는, 선택권 없는, 사건들이 훨씬 더 인생에 큰 역할을 한다.
사건의 양상에 따라 인생에 나쁘게 작용할 수도, 좋게 작용할 수도 있다.
또 어떤 사건은 선택이 가능하지만, 선택할 시간이 없어서
나 의지와 상관없는 어디론가 내 인생을 떠밀어 버리기도 한다.
(많은 위대한 사람들의 증언들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발견된다.)
이런 사건 중심의 인생을 생각하면 선택보다는 '보험'과 '선한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
다시 선택으로 돌아가서, 이전에 했던 내 선택들을 다시 생각해본다.
만약 짬뽕대신 짜장면을 먹었다면, 인생이 바뀌었을까 ?
나경원을 찍었으면 서울이 더 망가졌을까 ?
그때 "Go"을 했다면 바가지를 썼을까 ?
지난 날 다가왔던 많은 선택거리들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대개는, 맞고 틀림 또는 이기고 지는 것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던 다 맞고 다 이기는 것이다.
(이걸 서른 가까이나 나이를 먹고서야, 훌륭한 선배님 한 분에게서 배웠다.)
또, 선택을 위해 고심하는 척 하지만 대부분은 '첫 느낌'에 의한 선택을 주로 해왔다.
선택을 위한 고심은 기술적 분석이 가능할 때만 할 수 있는데,
인생에서의, 특히 젊을 때의 많은 선택 거리들은 '기술적' 분석이 가능하지가 않다.
그런데, 분석이 안되면 고민과 걱정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선택한 길에 대한 두려움,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
선택한 길에 놓인 장애물에 관한 걱정,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변명 거리.
그런 것들을 걱정하거나 명분을 쌓는 시간을 '고심하는 시간'으로 포장한다.
부질없다.
그래서
젊을 때는 빠른 선택과 선택한 것에 대한 몰입이 매우 중요하다는 거다.
그런 마음가짐 때문이었는지 언제부턴가는 'Yes'를 많이 하는 삶이 되어버렸다.
나이가 들고보니, 양상이 좀 달라졌다.
내 선택이 나 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 영향을 꽤 끼친다는 것이다.
아직도 그런 선택이 옳고 그름, 이기고 짐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즉,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별 차이가 없어보인다는 내 가치 판단과는 달리
나를 바라보는 주변에서는,
각자의 상황이나, 내가 알 수 없었거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기반으로
옳고 그름, 이기고 짐, 널널함과 피곤함 가운데 하나를 '내 대신' 느끼거나
그렇다고 정의를 내려버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뭔가 '인간적인 소소한 문제들'을 초월한 고수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월말에 월급 꼬박꼬박 받으려면,
또 늙고 힘이 빠졌을 때, 밥이라도 제대로 얻어 먹으려면.
그래도 뭔가를 옆에서 동의할 수 있는 선택을 해야 한다.
즉, 내가 아닌 내가 선자리도 중요해진다.
그래서 이제는 뭔가 'No'을 더 많이 해야하는 거다.
미안함과 다행스러움을 동시에 느끼면서
또 결정적인 순간에 'Yes'를 할 수 있다고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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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뽕, 짜장면에서부터
나경원, 박원순 중에 누굴 찍을까 ?
또 일부 집안에서는 명절 때 둘러 앉아 Go를 해야할까 말아야 할까 ? 까지.
사실 오랫동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까지 '나' 라는 개념이 생긴 이후 살아온 인생의 적어도 반 이상 동안은
(선택권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무조건 좋다는 믿음 아래)
사람이 더 배우고, 더 모으고, 더 느껴보는 것을 추구하는 중요한 이유가
선택의 폭을 넓히기 위함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즉, 인생과 관련된 어떤 갈림길에서 좀 더 좋은 조건이 생긴다는 것이다.
또, 내 인생 뿐만 아니라, 학생들과의 상담에서도,
선택권이라는 것의 중요성을 꽤 많이 강조했었다.
선택권이 자신에게 없으면 아마도 끌려다니는 삶을 살게 된다면서.
그런데 ...
(아마 다른 사람도 그랬을 거라는 엄청난 일반화와 함께)
살아오는 동안 몇 가지의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고 나서,
사실 인생이 꼭 그런게 아니라는 걸 조금씩 알게 되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사소한' 것들보다,
어느날 조용히 다가오는, 선택권 없는, 사건들이 훨씬 더 인생에 큰 역할을 한다.
사건의 양상에 따라 인생에 나쁘게 작용할 수도, 좋게 작용할 수도 있다.
또 어떤 사건은 선택이 가능하지만, 선택할 시간이 없어서
나 의지와 상관없는 어디론가 내 인생을 떠밀어 버리기도 한다.
(많은 위대한 사람들의 증언들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발견된다.)
이런 사건 중심의 인생을 생각하면 선택보다는 '보험'과 '선한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
다시 선택으로 돌아가서, 이전에 했던 내 선택들을 다시 생각해본다.
만약 짬뽕대신 짜장면을 먹었다면, 인생이 바뀌었을까 ?
나경원을 찍었으면 서울이 더 망가졌을까 ?
그때 "Go"을 했다면 바가지를 썼을까 ?
지난 날 다가왔던 많은 선택거리들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대개는, 맞고 틀림 또는 이기고 지는 것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 쪽을 선택하던 다 맞고 다 이기는 것이다.
(이걸 서른 가까이나 나이를 먹고서야, 훌륭한 선배님 한 분에게서 배웠다.)
또, 선택을 위해 고심하는 척 하지만 대부분은 '첫 느낌'에 의한 선택을 주로 해왔다.
선택을 위한 고심은 기술적 분석이 가능할 때만 할 수 있는데,
인생에서의, 특히 젊을 때의 많은 선택 거리들은 '기술적' 분석이 가능하지가 않다.
그런데, 분석이 안되면 고민과 걱정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선택한 길에 대한 두려움,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
선택한 길에 놓인 장애물에 관한 걱정,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변명 거리.
그런 것들을 걱정하거나 명분을 쌓는 시간을 '고심하는 시간'으로 포장한다.
부질없다.
그래서
젊을 때는 빠른 선택과 선택한 것에 대한 몰입이 매우 중요하다는 거다.
그런 마음가짐 때문이었는지 언제부턴가는 'Yes'를 많이 하는 삶이 되어버렸다.
나이가 들고보니, 양상이 좀 달라졌다.
내 선택이 나 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 영향을 꽤 끼친다는 것이다.
아직도 그런 선택이 옳고 그름, 이기고 짐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즉,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별 차이가 없어보인다는 내 가치 판단과는 달리
나를 바라보는 주변에서는,
각자의 상황이나, 내가 알 수 없었거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을 기반으로
옳고 그름, 이기고 짐, 널널함과 피곤함 가운데 하나를 '내 대신' 느끼거나
그렇다고 정의를 내려버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뭔가 '인간적인 소소한 문제들'을 초월한 고수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월말에 월급 꼬박꼬박 받으려면,
또 늙고 힘이 빠졌을 때, 밥이라도 제대로 얻어 먹으려면.
그래도 뭔가를 옆에서 동의할 수 있는 선택을 해야 한다.
즉, 내가 아닌 내가 선자리도 중요해진다.
그래서 이제는 뭔가 'No'을 더 많이 해야하는 거다.
미안함과 다행스러움을 동시에 느끼면서
또 결정적인 순간에 'Yes'를 할 수 있다고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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