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을 평가하는 일 말고, 기획하는 일도 비슷한 문제가 있습니다.
실제 많은 기획은 정말 알차게, 잘, 되고 있다고 믿으며,
분야 및 주관 기관에 따라, 또 개인적 느낌에 따라
정책, R&D 기획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다른 분들의 경험은 저와 많이 다를 수 있고,
좀 과장해서 쓴 내용이라는 점을 고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타나 좀 적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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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취지 설명회를 합니다. 고위 정부 관리, 자문 위원 오십니다. (이 장면에서, 정부 측의 핵심 단어는 '원점에서', '예산은 고려하지 말고'입니다. 기존의 유사한 여러 사업이 있었는데, 이번의 기획으로 판을 새로 짠다는 취지입니다. 자문위원들의 핵심 단어는 '예전에도' 입니다. 이런 기획이 있었는데, 이런 저런 정곡을 찌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취지 설명회는 높으신 분들이 시간 내시기가 어려운 관계로, 보통 시내 호텔에서, 조찬으로 합니다.)
1. 전문가들을 모십니다. 교수+국책연구소+업체 보통 이렇게, 모양 좋게 교수가 대개 대장이 됩니다. (이 장면에서, 대기업의 정말 유관 핵심 관계자를 모시려고 했으나, 이런 저런 이유로 참여를 거부하는 바람에, 대기업에서 핵심이 아닌 분들이 오시고, 또, 핵심 기술을 가지고 잘나가는 업체보다는 대기업과의 관계에 한이 많으신, 또는 뭔가 생존을 위해 정부 사업에 귀를 기울여야하는 중소기업 분들이 업체에서 오십니다.)
2. 전문가들의 식견으로는 부족하므로, 업체/교육기관 실태조사(설문, 인터뷰)도 병행합니다. (이 장면에서, 상당히 많은 업체들은 응답을 안하거나 못합니다. 그 이유는 주로, 기업 비밀, 중소 기업인 경우 '갑'회사의 눈치, 사실 잘 몰라서 등이며, 결정적인 이유는 얼마전에도 비슷한 설문이 있었는데 또 하자니 시간이 아까워서 입니다. 그 결과 신뢰할 만한 조사가 잘 되지 않으며, 결국 다양한 통계의 마술이 동원됩니다.)
3. 시장, 현황 파악을 합니다. (이 장면에서, 믿을 만한 시장 조사 자료가 없습니다. 외국 전문 조사기관 자료는 너무 비싸거나, 인용이 불가능합니다. 기존에 나왔던 보고서를 참조합니다. 올해가 2011년인데 2010도 예측치가 들어있는 그래프도 이용됩니다. 여러 숫자들이 확실하지 않지만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옮겨 놓고, 멋진 그래프로 마무리 합니다. 나중에 이 보고서를 보는 사람도 이 숫자가 어떻게 나왔는지에 별 관심이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4. SWOT 분석을 합니다. (이 장면에서, 단군이래 욹어먹던 단어, 문장들이 재등장합니다. '지정학적', '자원부족', 'IT인프라', '신흥국의 부상', '신서비스의 도래', '인력 유입', '인식의 전환', '취약한 생태계' 등등, 최근엔 S,W,O,T를 두개씩 묶어서 작전을 마련합니다. 같은 말인데 좀 더 있어 보입니다.)
5. 어떤 item을 R&D 할 건지에 대한, 즉 돈이 어디로 들어가는지를 결정하는, 고민을 합니다. (이 장면에서, 후진 질문이 난무합니다. '이 사업의 의도가 뭐냐 ?', '결국 얼마짜리 사업을 만들어야 하냐 ?', 심지어는 '누구를 위한 거냐 ?', '보고서/RFP는 총 몇 페이지로 작성하냐 ?' 등등 입니다. 실제 만들어지는 R&D 아이템들은 얼마/누구에 해당하는 핵심 질문에 누구나 바로 답할 수 있는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R&D에는 항상 기대효과가 있는데 그것대로라면 우리나라는 지금같지는 않아야 하는 겁니다)
6. 우리와 유사한 기획이 다른 그룹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 장면에서, 놀랍게도 다른 그룹의 진행 상황을 공식적으로는 알 방법이 별로 없습니다. 같은 세금인데 창구가 아주 약간 달라 경쟁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획에 포함된 전문가들이 비교적 작은 pool에서 선정되기 때문에, 분위기 파악을 하는 것이 꽤 가능하며, 땅 가르기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7. 로드맵을 그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장면에서, 유사한 기획이 최근에도 있었다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로드맵은 장기적인 것이기에 바뀌어서는 안된다는 이유가 붙습니다. 가끔은,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기존 로드맵이 틀렸기 때문에, 새로 그리는 것이 맞겠다는 요구가 있기도 합니다. 여러 분야를 다루는 큰 기획의 경우, 분야와 산업특성, 시장이 달라도 같은 기간, 같은 스타일의 로드맵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누군가 파워포인트로 만든 로드맵 템플릿이 전달됩니다. 어디서 베꼈는지 온갖 장식 때문에 우리꺼에는 맞지 않아 그냥 처음부터 다시 그리는 거보다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8. 어떤 때는 캐치프레이즈도 필요합니다. (이 장면에서, 캐치프레이즈에는 높으신 분이 쓰시는 단어, 목표가 포함됩니다. 정책의 일관성을 위해서 랍니다. 머리를 쥐어짭니다. 높으신 분들의 단어와 목표는 납세자 또는 유권자가 투표한 직후까지만 기억하길 원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심하게 선정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9. 생뚱맞은 안이 기획의 중심에 낙하산으로 내려옵니다. (이 장면에서, 그 안이라는 것은 많은 세금을 한 몫에 태울 수 있는 '~~센터 설립' 같은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실제로는 그런 것이 없어서 일이 안된적이 없는데, 그것만 있으면 모든 일이 다 잘될 것 같은 논리가 아주 빨리 만들어집니다.)
10. 전문가들의 분담으로 기획서가 작성됩니다. (이 장면에서, 회의 참석이 아니라서, 비용-자문료-이 지불되지 않는 숙제에 전문가들은 많은 시간을 쓸 방법도, 의지도 없습니다. Cut&Paste를 무기로 마감일 전날 오후부터 작업을 합니다. 다들 직업에 회의를 느낍니다. '원점에서 다시'는 먹히지도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예산을 의식하면서' '예전에도' 했던 내용이 담깁니다.)
11. 기획보고서가 중간 버전으로 통합 정리됩니다. (이 장면에서, 포맷을 맞추는데 엄청난 시간이 든다는 걸 절감하고, 애들을 풀어서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나, 시킬 애들이 없습니다. 시간이 많이 드는 이유는 template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전 보고서에서 C&P 했던 것들의 포맷이 엉망이기 때문입니다.)
12. 워크샵을 합니다. (이때, 모든 기획위원들이 가능한 날짜와 장소를 맞추기는 것이 불가능해서, 핵심 아이디어 맨들이 빠집니다. 멋진 정책, R&D 아이템에 대한 발표, 비판, 논의 보다는 각자 처한 애로 사항을 토해내는 데도 시간이 모자랍니다. 어차피 확신이 없거나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다른 전문가가 주장하는 부분에 심각한 반대를 하기엔 부담이 있습니다.)
13. 워크샵에 자문위원이 오십니다. (이 장면에서, 현장에서야 중간 보고서를 보게된 자문위원은 이 기획과 상관이 있건 없건 '넓은 혜안으로' 이전에도 스스로 해오시던 주장만을 되풀이 합니다. 다들 수긍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는데 보고서 내용을 바뀔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14. 최종보고서와 요약본이 만들어집니다. (이 장면에서, 요약본은 높은 분에 대한 짧은 큰 글씨의 보고용, 좀 덜 높은 분을 위한 보고용 등을 만드는데 많은 리뷰와 수정을 거치며, 그에 맞추어 최종 보고서가 수정되지는 않는 경우도 있어서 가끔은 요약본과 보고서가 다른 메시지를 담기도 합니다. 문제 없습니다. 최종보고서는 저장용일 뿐, 보고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5. 기획이 끝나면, 다시는 이런 일에 참여하지 않을 것을 결심합니다. (얼마 있다가, 전화가 옵니다. 이런 사업이 있는데, 국가적으로... 이 분야에 오랫동안 ... 이번엔 꼭 ... 좋은 의견만 주시면 일은 다른 누군가가 .... )
16. 또 0번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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