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영화와는 직접 상관없는 긴 감상평..
- 스포일러 아님. 걱정마라 -
- 전문용어 나옴. 미안하다 -
그 전, 대학 1 학년 때(1982년) 이야기 먼저.
그 때는 프로그램을 짜려면 펀치카드 라는 것을 썼다. 손으로 구멍을 뚫을 수는 없는 것이므로 펀치실이라는 것이 전산실에 있었고, 그 방에서 코딩지에 프로그램 짠 것을 한줄에 한장씩 펀치카드로 만들고 맨 앞에 Job Card를 얹어 고무줄로 묶어 전산실 창구 제출하면, 다음날 결과를 종이에 뽑아주었다. (그때, 카드 한장이 7원이었고 학교 식당의 라면이 아마 100원, 달걀 넣으면 150원 이었을 거다. - 그래서 코딩지의 코드를 엄청나게 self-리뷰해서 에러가 없게 만들어 돈과 시간을 절약해먀만 했다)
그 펀치실은 뒤의 탁자에 가방을 놓고, 펀치 기계에 앉아서 타이핑을 하는 식이었는데, 그 방에서 도난 사고가 많이 났다. 주 도난 아이템은 공학용 계산기 였다.
어느날 위 사진의 내 계산기도 도난을 당했다. 음... 사소한 것에 분개하는 정의감이 불타올라 범인을 잡기로 결심했다. CCTV 같은 것이 없던 시절에 펀치실 구석에 앉아, 안보는 척 하면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 봤고, 결국 다른 친구 가방에서 계산기를 꺼내던 범인을 잡았다. 학생인 척 하면서 왔다갔다 하던, 나랑 인사도 했던 좀 나이 많은 복학생 삘 나는 사람이었다. 그 범인을 수위아저씨에게 신고했다. 이게 1987과 어떤 상관이 있는지는 지금부터다.
수위 아저씨는 그 범인을 당시에는 학교 안에 상주해 있던 짭새들이 대기하는 방으로 데리고 갔다. 나도 그 있는지도 몰랐던 방에 따라갔었는데, 그 범인을 무릎 꿇리고 지나가는 모든 짭새들이 한대씩 때리고 가는 걸 봤다. 음.. 착하게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날 나는 현장 상황을 잠깐 이야기하고 나왔다.
다음날 신림동의 진짜 파출소에서 잠깐 와서 진술서를 쓰라고 연락이 왔다. 갔더니 그 범인이 흔히 보는 경찰서의 책상 앞에서 고개를 숙인채 조사를 받고 있었다. 좀 풀이 죽어있는 듯했지만, 또 현장의 그 범인 가방에서 몇 개의 전자계산기가 나와 전시되어 있었지만, 내가 갈 때까지는 아직 아무 자백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본 대로, 내꺼도 찾아달라고, 이 자가 범인이 틀림없다고 진술서를 쓰는 와중에도, 취조는 계속 되었고 역시 모든 지나가는 경찰(여기는 파출소라 정식 명칭)들이 그 범인 머리를 한 대씩 때리고 갔다. 음.. 좀 심한데? 그렇게 그 범인은 자기가 안했다고 계속 주장하다가, 취조를 하던 경찰이 그 범인을 뒷문 쪽의 어떤 방으로 데리고 갔다가 10분쯤 후에 나왔다. 나왔는데 머리부터 온 몸이 다 젖어 있었고 바지도 찢어져있었다. 비명소리를 듣지는 못했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갔다. 그리고 그 범인은 아까보다 말을 많이 했고, 다음날 뉴스에 학생의 도움으로 대학내 도난 사건이 해결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결국 내 계산기는 찾지 못했고, 범인이 괘씸했지만 정말 미안했다.
이제 진짜 1987 언저리.
대학원 석사 과정이던 그때도 난 그 이전처럼 땜질에 몰두해 있었다. 68000이라고 들어는 봤는가? 그걸로 지금 생각하면 라우터같은 걸 만들고, 거기에 TCP/IP 올리고.. 뭐 그런 심심풀이 석사 논문 작업과, 수입이 크게 되지는 않았지만 (학교의 물리학과 등 실험실에 사용되는 장비 만드는) 알바를 하느라 종일 떔질과 래핑을 하고, C와 어셈블러, 롬에뮬레이터 사이를 왔다갔다 했다.
사람이 땜질과 코딩만 하고 살 수는 없으므로, 다른게 필요했는데 그건 항상 내 곁에 있었던 '피아노'가 아니고, 무전기였다. 그때 아마츄어무선(HAM)이라는 고급진 취미를 가지고 있어서, 집에는 VHF 무전기, 지붕에는 큰 안테나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항상 그걸 켜 놓고 땜질과 코딩 작업을 했다.
당시 서울의 경찰들은 그대로 목소리가 전달되는 아날로그 VHF FM 무전기를 사용할 때 였고, 내가 가진 VHF 장비로 그들의 통신을 '감청'(도청 아님) 할 수 있었다. 경찰들은 당연히 어떤 상황이나, 특정 인물에 대하여 다른 단어를 사용하는 암호를 사용했으나, 바보가 아니면 한 시간 정도에 그 암호가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여름, 시내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대처하는 경찰들의 교신 내용을 일부 들을 수 있었고, 그들 사이의 긴박함을 즐기면서, 그 반대쪽에 있던 학생들의 상황을 예측하곤 했다. 또 한편으로는 같이 나가 돌이라도 던지거나, 소리라도 지르지 않고 한가롭게 땜질하는 내 자신이 죄스럽기도 했다.
당시엔, 저녁마다 땡전 소식이 끝나면, 뉴스에 시위 장면이 나왔고 어른들은 '전두환'의 용어를 썼다. 빨갱이라고. 아마 나뿐만 아니라 그때를 살았던 모든 대학생들이 자신이 화염병을 던지지는 않았어도, 집안의 어른들에게 왜 학생들이 시위를 해야만 하는지, 왜 화염병을 던져야 했는지 열심히 설명했을 것이다. 그것이 행동하는 친구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니었을까 한다.
1987 영화를 보면서, 눈물이 계속 흘렀던 이유는, 그때 같이 나가서 뭔가를 하지 못했다는, 비겁했다는, 그래서 어쩌면 나대신 같은 시대를 살던 많은 친구들이 스스로 몸을 불사르고, 도서관에서 투신을 하고, 전경, 짭새들에게 잡혀 고문을 당했다는 죄책감 떄문이었을 거다.
진심으로 미안하고 반성한다.
*
'내 주변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집 침대도 대진 라돈 침대 ㅠ [1] (22) | 2018.05.05 |
---|---|
1987 + 4년 후 이야기 (1) | 2018.01.21 |
NHN NEXT를 그만두며 (30) | 2015.02.24 |
보험과 꿈 (2) | 2014.09.28 |
그래요. 저 옮겼어요. (2) | 2013.08.21 |